하여가와 단심가
하여가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떻하리
성황당 뒷담이 무너진들 어떻하리
우리들도 이같이 하여 죽지 않은들 어떻하리
-이방원-
단심가(丹心歌)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정몽주-
하여가와 단심가는 고려말의 학자이자 충신이었던 정몽주와 아버지 이성계를 추대해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던
이방원이 주고받은 시조이다. 정몽주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서 이방원은
(하여가)를 읊었고. 이에 답하여 정몽주가 부른
시조가 (단심가)이다.
한국 옛말에 좋은게 좋은 것이라는 뜻과 비슷한 하여가는 어떻게 보면 현대 처세술의 기본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교회 안에서 은혜롭게라는 핑계로 대충 대충 사교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으며 단심가처럼 지조 있는
말을 하면 알게 모르게 소외당하여 반 강제적으로 하여가처럼 사교적으로 살아야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경우가 많다
많은 사람들은
교회를 목사님이 좋아서, 친구 따라, 가족들이 교회에 출석하니까
등의 이유를 전제로 신앙생활을 한다. 그리하여 하여가처럼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떻하리 하며 사교적, 습관적으로 신앙 생활을 한다. 지금의 교회 현실은 주만을 바라보며 신앙을 지키면서 살아가기에는 교회 안의 여러 가지 정치적, 신앙적 문제들이 일편단심으로 님만 바라보며 살아가기 힘들게 한다
그 반면 교회 안에서 여러 가지 다른 이유와 소위 신학에 정통한 분들이 갖은 ‘영적’문제를 핑게로 서로를 판단하며 파벌을 지어 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예수님은 무지한 우리들에게 모든 율법을 간단하게 정리하여 주 여호와를 사랑하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정리해 주셨다, 그 어떤 이유가 성도들이 서로 분열하여 서로 비판하게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들이 서로를 비방하기에 앞서 서로를 자기 몸처럼 생각하여 서로에게 언행을 삼가 한다면 분쟁의 이유가 많이 줄어들지도
모른다 . 예수님은 자신을 못 박은 자들을 위하여 저들을 용서하라고 기도 하시지 아니 하셨는가
만약 예수님이
현대 교회에 재림하신다면 우리들은 그분을 맞이할 것인지 아니면 바리세인처럼 그 분을 십자가에 다시 못 막을지 생각해 볼만한 일이다. 그 당시에 예수님은 교회 성직자와 지도층에게는 듣기 싫은 곧은 말을 하셨고,
잘못된 교회 행정을 비판하셨으며, 항상 힘없고 가난한 자들과 어울리셨다. 크리스천이란 그리스도를 닳아 가는 자들이란 뜻이다, 그런데 혹시
누군가가 교회 안에서 예수님을 따라 행동을 한다면 그것이 교회 지도자를에게 소외를 당할것인지 인정을 받을것인지 모르는 일이다.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한국 기독교계 소식들과 아르헨티나 교회 소식들 가운데 앞만 보고 달려가는 나에게
정몽주의 단심가는 신앙의 초심과 믿음의 기본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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