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 산 마르띤 선생님은 피부과 의사셨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 평신도로서 선교사의 삶을 살다 가신 사라 산 마르띤 선생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80이 훨씬 넘으셨을 것으로 짐작하지만 나이는 끝까지 비밀이었습니다.
28세 때 이 나라에서 가장 좋은 병원에서 군대 같은 훈련을 받으시고
군정에 의해 병원이 해체되던 해 뻬나 병원에 피부과 과장으로 이임되어서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과장으로 사신 분입니다.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이 두려워 웬만한 수술도 부분 마취로 하셨고 8살에
버려진 가여운 여자 아이를 입양하여 키우며, 주어진 물질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의사로서 그 흔한 의료
보험 하나, 차 한대 소유하신 적이 없습니다.
살아오신 작은 집은 딸아이와 손주들을 위해 두셨으나 그 외에는 옷다운 옷 한 벌 없이 겸손히 살아오신 분이십니다. 깨끗하고 단정하면 된다는 정도의 그러나 내면에서 나오는 품위로 치장하신 분이었습니다. 그 분에게는 아름다움을 위한 화장품도 사치품이었습니다.
구세군 교회 교인이셨던 그 분은 아침마다 큐티 하는 것을 선교지에 가서도 한 번도 빼 먹은 적이 없으십니다. 함께 모여 예배 드리고 기도하는 것 외에도 새벽에 일어나서 말씀을 보고 제가 힘들다 낑낑 거릴 때는 그 입술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성경 구절이었습니다.
차꼬 지역에 선교 갔을 때 전기로 물을 데우는 보기에도 불안한 기계가 수도에 붙어 있어 감전 된다고 키득 거리며
아무도 샤워 할 생각을 못하고 있을 때 나는 괜찮아, 내가 제일 먼저 하지 하시며 들어가 먼저 샤워
하시고 안전을 확인하고 사용법과 온도를 알아서 나머지 멤버를 위해 조절해 주셨습니다.
선교지에서 손톱 깍기가 없다고 말하니 이런데 다니는 것도 다 기술이라며 손톱 갈이를 꺼내어 제 손톱을 직접 손질해
주셨습니다. 평생에 그 간단한 손톱 손질을 손톱 깍이가 아닌 손톱 갈이 (lima) 를 이용해 피부과 과장에게 직접 받은 사람이 몇이나 될지요... 그
후론 손톱 깍이를 늘 챙기고 손톱으로 불평하지 못합니다.
그 분은 귀가 잘 안 들리는 지라 보청기를 쓰셨습니다. 보청기를 빼실
때는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시간이라 귀가 안 들리는 것이 너무 감사하다고, 소음이 들리지 않아서 너무 행복하시다고...
커다란 낡은 비닐 봉다리 두개로 나누어 양손에 들고 어깨로부터 대각으로 매는 가방 하나에 그 외 필요물을 넣어서 18년 동안 한 빈민촌을 혼자 들어가서 말씀을 전하시고 문둥병 환자 및 여러 피부 환자를 진료 하시며 그 마을에
교회가 생기고 마을이 하나님 안에서 번성해 가는 모습을 가장 즐거워 하셨습니다. 어느 날 마을에서 나오는
길에 강도가 쫓아왔다가 선생님을 알아보고 사과 하고 가방을 기차까지 들어다 주었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수도권 지역에서 매 휴일마다 이루어 지는 의료 선교팀의 활동도 한 번 빠지신 적이 없으십니다. 늘 낡은 두 비닐 봉지를 들고 나타나십니다. 그 분이 쓰시는 피부과에
필요한 약은 돈을 주고라도 구입하여 환자들에게 나누어 주시곤 하셨습니다. 지방 선교를 갈 때 6개월 이상 약이 필요할 경우에는 늘 천사가 있는 법이라곤 하셨는데, 정말로
기적같이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지 그 마을 어느 나무 밑에 사는 누구에게 전해달라고 약을 보내면 그 약이 그 사람에게 전해지곤 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신기한 일이었는데 선생님은 당연하게 늘 그렇게 해 오셨습니다.
병원에 마약을 하는 환자나 알콜 중독에 걸린 환자를 도와 주시던 마을 목사님과 함께 하는 구제소에 보호하시며
몇 달씩 생활비를 대주며 돌봐 주는 것은 선생님께는 일반 일입니다. 지방에서 피부 암으로 인해 정밀
검사를 요하는 환자들에게 병원을 알아봐 주는 것도 그 분의 일반적인 일이었지요…
선교지에서 보는 피부 질환은 조직학적 진단까지도 한번도 틀린 적이 없습니다. 제가
함께 한 15년 동안 의사로서의 실력이나 인격에서 한번도 흔들리거나 흐트러짐이 없으셨습니다. 항상 우리는 모두 군사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배 안의 아들을 잃고 3개월 만에 미시오네스 주로 선교 갔을
때 19명의 아이를 낳은 인디오 구아라니 족 여인을 진료하게 되었습니다. 검진을 꼬박 꼬박 받았는데 사산을 하게 된 나에게는 아무 검진도 받지 아니하고 아이들의 이름도 다 기억하지
못하는 인디언 여자를 진료하는 것이 너무 힘들고 버겁게 느껴졌습니다. 그 여인을 진료하고 잠시 진료실에서
나왔는데 거기 사라 선생님이 서 계셨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던 때 함께 계시며 가만히 안아주셨습니다.
하나님도 그 분의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지... 너의 아픔을 아이를
낳지 못한 내가 어찌 알겠냐만은... 하나님의 위로를 바란다...
안아주시는 그 품이 너무 따스해서, 그냥 울으라고 하시는 그 마음이
너무 고마와서...
ACAPS 회원이면서 남미 의료 선교팀도 인도하시던 이분은 제 작년 12월 24일 급성 복통으로 병원에 가셨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라 아무도 귀찮게 하고 싶지 않으셔서 무료 병원으로 가셨다가 과장이라는 것으로 의사들을 귀찮게
않으시려 평인처럼 진료 받으시고 수술 중 사망하셨습니다.
우리가 도와 드릴 수 있었는데, 과장이라는 이름으로 충분히 병원에서
혜택을 받으실 수도 있었는데, 좋은 친구 의사도 많았을 것인데… 우리
중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으신 것이 원망스러웠지만 끝까지 권위에 의지 하지 않으시고 지인에게 의지 하지 않으시며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평안의
품에 안겨 가신 것이 남은 이들에게는 아픔이고 도전입니다.
그분의 장례식에 온 저보다 더 오래 된 지인들의 이야기들은 모두 천사 같은 하나님의 여종의 행각이 얼마나 우리가
따르거나 흉내 내기 어려운 것임을 알게 하는, 그러나 본이 되신 아름다운 모습이었음을 고백합니다.
너무 많은 이야기들,... 너무나 많은 기억들… 그러나 너무 길어서 이쯤 줄일까 합니다. 아직도 ACAPS는 계속 선교 여행을 합니다. 그 때마다 피부과 전문의 사리따
선생님을 모두 기억합니다. 올 해는 엘 살띠또라는 곳을 다녀왔습니다.
세계 제 2차 대전 후에 남은 전범의 후예라 불리는 독일계 사람들이 비참하고 가여운 생활을
하는 곳입니다. 전화기가 없어도 방송이 없어도 입소문으로 말타고 염소 타고 하나 둘 씩 무료 진료를
받으러 오는 그런 곳입니다. 사라 선생님과 함께 했던 산 뻬드리또에서 멀지 않은 곳입니다. 그 때 우리의 사역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한 산 뻬드리또의 아날리아 선생님도 우리와 함께 하신 사역이었습니다. 부활절 연휴 3일동안 약 700여명의
환자를 진료하고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새로 들어와 함께 하는 젊은 의사들이 많아 더욱 힘이 나는 선교 여행이었습니다. 우리 젊은 이들도 그 분의 나이가 될 때까지, 아니 우리 생명이
다 할 때까지 하나님을 그렇게 섬길 수 있을까, 지금도 함께 하시는 연로하신 선생님들의 건강도 잘 챙겨야
할텐데… 늘 기도하고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10년 만에 다시 찾은 미시오네스주,
그 때의 기억이 새로와 감사하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나의 친구 사리따 산 마르띤 의사선생님을 기억하며,
물질과 권위에서 자유로웠던 그 분의 선교적 삶을 본받기를 원하며 이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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